넓은 들판과 나무 그늘 아래 등받이가 있는 나무 벤치만큼 안락한 곳이 또 있을까.
만일 공기와 햇살이 내 몸과 맞닿는 방향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.
이 상상의 기원 속 의자가 실제로 생겨난 건 약 4,800년 전으로 추정되지만 누구에게나 편히 쉴 자리가 될 수 있었던 건
불과 300년도 되지 않는다. 그것도 초기에는 계층에 따라 매우 제한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.
기댈 수 있는 긴 등받이와 팔걸이를 갖춘 안락한 의자armchair는 주로 특권 계층에게만 허락되었다.
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자라고 해 봤자 여럿이 함께 앉는 긴 공용 의자settle, bench나
등받이 없이 앉을 수 있는 스툴stool 정도였다.
좌식 문화권이었던 우리나라에서도 의자를 사용했던 옛 기록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, 우리에게도 의자는 귀한 물건이었다.
『조선왕조실록』에는 세종 7년에 귀빈이나 사신에게 내리는 하사품으로 벼슬아치들이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기도 했던
접의자胡床를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. 궁중의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린 <의궤도>에도 왕의 모습을 대신해
왕좌를 그려 넣어 귀한 신분을 의자로 상징했었다. 이처럼 의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, 그 기능과는 별개로
소유자의 지위와 신분을 상징하는 사물로 여겨졌다.
의자가 대중화된 건 산업혁명 이후이다. 기술의 진보는 우리네 삶에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었고,
대량생산으로 인해 누구나 의자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. 게다가 다양한 디자인의 의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.
그 시작의 배경에는 법랑이나 알루미늄, 플라스틱과 같은 신소재들의 등장이 있었다.
디자인은 이 소재들을 혁신적으로 사용하며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자유분방하고 실험적인 의자들을 탄생시켰다.
그 파장은 의자의 세계에까지 이어졌다. 그동안 의자라고 믿어왔던 형태를 철저히 파괴한 의자들이 여기저기서
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. 그에 가장 완벽한 의자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자노타Zanotta사의 사코Sacco가 대표적인 예이다.
1968년 등장한 ‘부대자루’라는 의미의 콩 주머니 의자 사코는 인조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자루에 합성수지 알갱이가 충전된 형태로
팔걸이도, 네 개의 다리도 없지만 기꺼이 ‘앉을 것seats’이 되어 주었다. 이 의자의 가장 큰 특징은
사람이 의자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의자가 사람의 자세에 따라 유기적으로 변한다는 데 있다. 물렁물렁하고 형태도 없는,
이 의자답지 않은 의자는 그 누가 앉더라도 앉은 이의 자세를 완벽하게 흉내낸다.